나의 이름은 연옥. 본명이냐고 물어보시는 독자분들이 왕왕 있는데 필명이다. 나의 사생활을 낱낱이 열거하는 에세이를 쓰면서 차마 본명으로 활동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본명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지는 않는, 무엇보다 독립출판계에서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필명으로 골랐다. 물론 그 뒤로 어디에서 이름의 뜻을 물어보면 멋있어 보이기 위해 이런 설명을 덧붙이긴 한다.
“연옥이란 말이죠, 가톨릭 세계관에서 구원을 보장받긴 했으나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영혼이 천국에 가기 전 단련하는 과정이래요. 뭐랄까… 저는 제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엉성하게 서 있다고 느끼거든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 살아있다는 긴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천국도 지옥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걸쳐졌다는 의미가 마음에 들었어요. 지금 받는 고통이 언젠가 천국이라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싶기도 하고요. 음, 너무 현학적인가요? 이 정도 허세를 부려줘야 어디 가서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안타깝게도 난 이 필명을 지은 이후로 정신건강이 많이 좋아져서 지옥 근처를 맴돈다는 느낌도 사라졌고, 정신을 차리면서 허세를 부끄럽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바뀐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어디 가서 나를 작가라고 소개하는 걸 주저하기 시작했다는 것. 갓 오븐에서 꺼낸 빵, 막 알을 깨고 나온 따끈한 병아리마냥 초심이 후레쉬- 하던 독립출판 입문 시절에는 내가 작가인걸 참 좋아했었는데. 북페어에서 만난 다른 셀러들에게 “어머 작.가.님. 안녕하세요, 저는 연옥 작.가.입니다”라고 힘주어 인사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달라졌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여전히 사용하고 작가로서 가지는 정체성은 공고하지만, 남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직장인입니다” “작은 사업을 운영해요”와 같이 말하는 타이밍에 “저는 작가입니다”라고 말할 자신은 사라졌다.
자기소개를 할 때 흔히 이름과 나이 뒤에 따라붙는 저 말들은 모두 주된 돈벌이 수단인 ‘직업’을 의미하는데, 난 글로 돈을 거의 벌지 못한다. 그건 마치 “저는 블로거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고양이 똥을 치우는 집사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책임감을 가지고 매일 수련하듯 반복하더라도 수입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걸 나의 ‘일’이라고 부를 수 없지 않을까. 일인 척하는 취미. 전업 작가의 꿈을 게으르게 좇고 있는 만년 지망생의 자기 합리화. 무엇보다 내가 허세와 가난에 취한 대책 없는 예술가로 보일까 봐 두려웠다. 현실 감각 없이 부유하는 철부지로 살기엔 또래들이 난자 냉동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 나의 나이가, 자신의 등골을 뽑아 얻어낸 딸의 대학 졸업장이 쓰임이 있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돈으로서 어른스러움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회사 다니던 시절의 습관일까, 혹은 노후에 길바닥에 나앉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이자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야무짐일까. 사실 뭐가 되었든 그냥 내가 자신만 있으면 될 문제인데. 이런 긴 핑곗거리를 붙여댈 정도로 난 자신이 없다.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는, 혹은 부르지 않는 나 자신이 모두 공평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실 나에게는 불과 최근까지도 직업이 있었고, 원한다면 그 직업으로 언제든 얼마든지 복귀할 수 있다. ‘입시/취업 컨설턴트’라는 삐까뻔쩍한 타이틀을 가장한 첨삭 노동. 남들이 학교나 회사에 합격하기 위한 이력서, 자기소개서, 면접 답변 등을 첨삭하는 일을 했었다. 이 일을 다시 나의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건 단 한 가지. 바로 내가 고객을 찾던 ‘숨고’라는 앱을 켜서 견적을 보내고 작업 의뢰를 기다리면 된다. 근데 그 쉬운 걸 왜 안 하고 있냐고? 그 이유는 2박 3일 동안 숨 쉬지 않고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길고 지난하기 때문에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다. (그게 궁금해서 구독하신 분들께서는 그 이유를 알게 될 때까지 부디 수신거부를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아무튼 난 지금 모종의 이유로 이런 유일한 수입 활동을 멈췄고, 그러자 돈을 버는 노동자 본캐와 취미 겸 지망생 그 어드메에 놓인 작가 부캐의 경계가 댐이 무너지듯 허물어져버렸다. 부캐로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 책 판매 정산금이 평소보다 적거나, 차기작 준비가 하염없이 늘어지거나, 북페어에서 공을 치거나 등 - 본캐는 언제든 비빌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었는데. 그 언덕이 사라지니 갑자기 본캐가 수행하던 책임이 모두 부캐에게 와르르 쏟아진 기분이다. 부족한 수입을 어떻게든 글을 써서 메워야 한다는 생각에 메일링 서비스를 열었고, 서점 입고 및 정산 현황을 면밀히 검토하며 재고가 떨어진 서점에 먼저 재입고 메일을 보냈다. 이걸로는 택도 없다는 걸 안다고 조바심이 덜 나는 건 아니다. 주변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수영을 할 줄 몰라도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글이 3천 자가 되어가는데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세이가 논설문도 아니고 늘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그래도 찝찝하다. 비단 이 글 하나에 대해서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작가지만 작가가 아니고, 돈을 벌고 있지만 성에 차지 않고, 멀쩡한 직업을 피해 다니면서 직업이 없다며 툴툴대는 나. 난 내가 대체 뭘 원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자신과 대화하는 과정을 기록하며 나름의 답을 찾고 싶었지만 과연 12주 뒤의 결과를 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답이라기보다는 지도에 가까울 것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시커먼 속내를 탐험하며 더듬더듬 그려낸, 고민과 욕망과 아집과 눈물이 촘촘한 길을 낸 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