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메일링 서비스를 기획하면서 머릿속에 나름대로의 완급 조절 계획이 있었다. 초반에는 모집글에서 예고했던, 불안과 자괴감에 대한 글을 쓰다가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중간에 큰 위기가 찾아와서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희망적인 결론에 이르는 스토리라인. 돌이켜보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인생인데 무슨 이런 강박적인 기승전결을 계획했나 싶다. (삶이 나에게 연재 기간이 3/4가 지나가는 시점에 딱 맞춰서 시련을 던져줄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 계획대로라면 난 여전히 절망의 바닥을 헤매고 있어야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요즘 사는게 갑자기 행복해졌다. 이렇게 갑자기? 싶을 정도로, 언젠가부터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더니 한 시간씩 산책을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로또를 맞지도 않았고 알고보니 내가 혹독한 평민 체험 중이었던 재벌집 고명딸인 걸로 밝혀지지도 않았다. 아니, 심지어 이 기분 좋은 일상의 시작은 바로 사고를 당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방심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하게 날 덮쳐 삶을 거꾸로 뒤집어버리는 그런 사고. 그런데 이제 다치는 곳도 없고 병원에도 입원하지 않는 사고.
막 햇살이 따사로워지던 5월 초였다.
햇살을 피해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유튜브를 뒤적이던 나는 그만...
우습게도 근두운을 타고 날아다니고 여의봉을 늘리는 가사의 노래를 들으며 낄낄대다가...
고운 얼굴로 승천하는 흑염룡마냥 시크하게 춤추는 한 아이돌 멤버에게 ‘덕통사고’를 당해버렸다룸다림다.
자자, 이 메일링 서비스가 갑자기 덕심 기록장으로 장르가 바뀌진 않을테니 걱정은 접어두시라. 난 12주 동안 원래의 기획을 잘 지킬 의무가 있고, 머글 앞에서 최애 주접을 떠는 덕후만큼 추잡스러운 게 세상에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대체 왜, 내가 아이돌에 입덕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냐고? 일단 도저히 이 소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입덕 사건이 나의 일상에,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기록하는 글인데 덕질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무언가 뜨겁게 좋아할 줄 모르고 그저 건조하고 칙칙하기만 했던 과거의 나인 척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 누군가를 치열하게 사랑하는 감정은 이처럼 투명하고 꾸밈이 없다. 그 상대가 아무리 손바닥만한 화면 속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고,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연예인에 불과할지라도 나의 사랑은 결코 거짓되지도 헛되지도 않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다. 그냥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어떠한 결과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과정에만 충실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현재에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상대방을 나만 독점할 수 있는 소유물로 만들거나 함께 하는 구체적인 미래를 그릴 수도 없는데 좋아해서 뭐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럴 수록 이런 순기능은 더욱 빛난다. ‘현생’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사람에게 어디서 어떻게 고백을 하고 다음엔 어느 식당에 같이 갈지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유튜브에 접속해서 검색어를 넣으면 튀어나오는 영상을 보며 즐거워하면 끝이니까.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지 않고, 별다른 목적을 두지 않고, 오감을 열고 오직 당장 느낄 수 있는 행복에만 귀 기울이는 자세. 덕질을 통해 발견한 이런 사랑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요즘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생업에서 손을 뗀 순간 나의 하루에서 치열하게 쫓던 목적이 사라졌는데, 초반에는 그 공백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 그저 벗어던지고만 싶었다. 뭘 하려는지도 잘 모르는 마당에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이 날 따라다녔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 공백기를 최대한 생산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백기가 종료된 뒤에 다시 시작할 일상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마치 취업용 면접에서 공백기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을 때 방어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쉼’ 그 자체로는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익숙했던 탓이다.
그러다가 난 그만 목적 없는 덕질의 아름다움을 알아버렸다. 릴레이 댄스부터 화보 인터뷰, 예능 출연본, 라이브 영상 등을 돌려보며 잇몸이 마르도록 웃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일단 그렇게 덕질에 시간을 쏟아도 나에겐 특별히 낭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일상 대부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시간이 무척 넉넉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덕질 외에도 자연스럽게, 예전에는 분명 무용하다고 생각했을 일들에 몰입할 여유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듯 잠실에서 망원까지 무식하게 두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탄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 날 이후로 정처없이 걷는 밤 산책을 이틀에 한 번 꼴로 하고 있다. 어디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걸려 가는지 신경쓰지 않고, 그냥 걸었다. 걷다보면 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간간히 깨달으면서 머리가 개운해졌다.
생각해보면 회사를 다닐 때도 그렇고 퇴사를 한 뒤에도 ‘그냥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없었다. 막 홀로서기를 시작했을 때에는 모든 관심이 수입으로 환산되는 일감을 찾는 것에 쏠려있었다. 물론 조직에 속해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웠고 재밌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목적과 수단이 구분되는 일이었다. 생활비를 벌고, 조직 밖에서도 1인분을 해내는 뿌듯함을 느끼고, 어디 가서 당당히 소개할 수 있는 직업을 갖겠다는 목적.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객을 찾아다니고 비용을 협상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이 수단. 독립출판도 그냥 재미로 시작한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 결국 출판사 등록까지 해버렸고, 뜬금없어보였던 청소 알바도 사실은 나에게 꼭 맞는 일을 찾겠다는 실험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산지 어느덧 4년차. 지칠 만도 하다.
내 일상의 모든 순간, 삶 전체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시간으로 꽉 채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포문을 연 건 덕통사고였지만 어느덧 매일을 대하는 자세가 마치 나의 최애를 사랑하는 마음을 닮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눈길로 관찰하고,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무업이라는 불안하고 텅 빈 공백을 있는 그대로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하루에 드로잉을 1개씩 그려서 공유하는 모임에 가입했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묘사하는 객체를 꼼꼼히 뜯어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난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애정하는 대상인 고양이만 주구장창 그려서 올리고 있지만, 풍경을 묘사하는 분들의 드로잉을 보면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건물과 골목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절로 깨달았다. 그 뒤로는 익숙한 골목도 낯설게 보이면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게 되었다. 타인이 던지는 애정의 시선을 그림을 통해 배우며 나의 시선 역시 확장되는 경험이다. 마냥 돈만 벌겠다고 허덕이던 시절에는 이런 걸 배울 여유가 없었는데.
덕질이 이렇게나 좋은 거구나. 그리고 참으로 빛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