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 2천 원으로는 뭘 살 수 있을까? 4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10.5잔, 1만 4천 원짜리 치킨 3마리, 집을 자주 비웠던 한 달의 수도세와 전기세(가스비까지는 택도 없지만), 최애를 응원하는 마음 가득 담아 손을 떨며 결제하는 스페셜 리패키지 앨범 디럭스 버전 1개(그걸로 팬사인회 당첨은 택도 없지만) 등을 사거나 해결할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다. 반면 42만 원이나 420만 원과 비교한다면 4만 2천 원이 나의 생계에 미치는 타격은 비교적 크지 않다. 분명 아쉽지 않지는 않을 액수지만 나의 평소 씀씀이나 기댈 수 있는 비상금의 규모를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으로 포기할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며,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원 단위까지 애매하게 붙여가며 이 액수를 굳이 언급한 이유가 있다. 4만 2천 원은 내가 동네 서점에 위탁한 나의 책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 5권을 모두 팔았을 때, 서점이 수수료를 떼고 나에게 입금해주는 정산금이다. 통상 서점에서 최초로 책을 입고받을 때 많아봤자 5권 정도를 받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완판’을 이뤄야지만 얻을 수 있는 기념비적 액수다. 서점의 정책에 따라 수수료율이 조금씩 다르고 정산 주기도 다양하지만, 가뭄에 콩나듯 통장에 찍혔을 때 날 춤추게 만드는 액수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일상이, 인생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자꾸 이걸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면, 내가 이 글을 쓰기 약 3시간 20분 전에 입금받은 4만 2천 원에 얽힌 모종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경기 침체와 사업 실패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끝내 나의 깊숙한 불안을 건드리며 끝이 났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고자 한다.
문제를 촉발한 원인은 비교적 단순하다. 나의 책을 입고하고 물량 전체를 다 판 한 서점에서 정산금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 곳과는 대부분 동네 서점과의 거래가 그러하듯 ‘위탁 판매’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는 창작자가 책을 입고하고 실제로 판매가 이루어진 뒤에 수수료를 제한 수익금을 정산해주는 방식이다. (소위 ‘현매’라고 불리는, 서점이 입고 시점에 입고 물량 전체에 대한 비용을 선입금하는 방식과는 달리 판매 없이는 정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판매가 발생하면 당연히 정산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 서점은 사업을 뒷받침할 자금 사정이 어려워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기한을 미루고, 아무런 예고나 설명 없이 미룬 기한을 어기고,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동일 서점에서 정산을 받지 못했다는 주변의 제보가 이어졌다. 슬슬 마음이 급해졌지만 중간에 결혼 준비를 하느라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렇게 정산이 이루어졌어야 하는 시점부터 6개월 넘는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나옹-
이런 위탁 판매 리스크는 독립출판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었다. 책을 보내주는 시점에 돈을 즉각 받는 게 아니다보니 서점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면 정산금은 커녕 재고도 돌려받지 못한다거나, 지금 상황처럼 책이 팔렸는데도 정산이 하염없이 미뤄지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책임감있게 사업을 운영하는 서점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작은 위안을 찾자면, 입고 수량이 워낙 소량이다보니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피해 액수가 큰 편은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일이 내 일이 되고 나니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4만 2천 원은 크지 않은 돈인가?’
정산금의 규모를 떠나 누구에게나 창작의 결과로 얻은 돈은 소중하지만, 아무리 내가 소중함을 어필하더라도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돈이라면 조금 다른 질문을 해야 했다. ‘법적 대응을 각오할 정도로 생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액수인가?’ 예전에 곗돈을 들고 튄 지인의 자산을 동결시키기 위해 나홀로 전자 소송을 한 후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받을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쓰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승소하면 상대방이 그 비용까지 다 부담하겠지만 그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용증명이라도 써볼 생각으로 못 받은 돈의 법정 지연 이자를 계산해보니 월 210원 수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돈을 받아내기 위해 박박 우기기 시작하면 너무 옹졸한 사람이 될 것 같아 그냥 쿨하게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말이다, 마음의 넉넉함은 통장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걸 그땐 잠시 잊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결혼 준비로 말도 안 되는 규모의 돈이 나의 통장에 들어왔다가 나가길 반복했던 시기였다. 예의상 축의를 주고 받는 지인이 보낼 최소 축의금인 5만 원에도 미치지 않는 4만 2천 원은 그다지 커보이지 않았다. 결국 통장에 꽂힌 돈은 거의 다 고스란히 본식 준비와 신혼여행 비용으로 쓰이는 바람에 이익(?)은 보지 못했지만, 아무튼 내가 순간적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착각만으로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냉정한 마음으로 가계부를 검토하고, 한숨을 푹 쉬고, 그런 와중에도 여러 이유로 첨삭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나니 결혼식 전의 인심 가득한 내가 전생처럼 흐릿해진게 문제였다.
대신 받지 못한 4만 2천 원이 잠들어있던 장기 기억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이전에는 그저 고물가 고금리 시대의 불쌍한 피해자로만 보였던, 얼굴도 모르는 서점 주인이 갑자기 힘없는 창작자들을 기만하는 악덕 사업주로 변신했다. 그런 악마같은 존재 앞에서 난 ‘정의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옹졸해질 자신이 있었다. 이를 박박 갈면서 서점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 헤맸다. ‘딱 기다려라, 내가 매일같이 찾아가서 피켓 들고 1인 시위하면서 괴롭혀줄테다. 나한테 제발 돈을 줄테니 집에 좀 가라는 곡소리가 나올 때까지.’ 과장 조금 보태면 그땐 그런 마음이었다. 부끄럽지만, 극에 치닫는 괘씸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봤을 거라고 믿는다.
서점 전화번호는 입점 계약서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나 말고도 빚쟁이들이 줄을 서있었으니 아예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찾아가기 전에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해 휴대폰을 켜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평소 식당에서 주문하기 전에 속으로 리허설 다섯번 하는 사람으로서 손가락이 조금 떨렸지만, 옹졸한 사람은 멈출 때를 몰랐기에 후퇴는 없었다. 0..1..0…
침을 꿀꺽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어? 왠걸, 시원하게 연결 신호가 귀를 때리는 게 아닌가. 침을 크게 삼켰다. ‘아니, 매일 독촉밖에 안 당할텐데 왜 전화기를 안 꺼놨지?’
당황한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 신호가 세 번도 채 울리지 못할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누군가가 덜컥, 전화를 받아버렸다.
“여…보세요?”
-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