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서점 주인과 덥석 통화를 하게 된 건 2023년 5월이지만, 잠시 시간을 돌려 2017년 12월로 돌아가보자. 매년 크리스마스 전후 단기 아르바이트로 바짝 돈을 벌고 크리스마스 이틀 뒤인 내 생일에 전 재산을 탕진하는 전통을 지키고자, 그 해에는 코엑스 안에 위치한 한 옷 매장 보안요원으로 일을 했었다. 말이 좋아 보안요원이지 그냥 검은 정장을 입고 가만히 서있는 걸 11시간 57분 동안 하다가, 출입문 앞에 설치된 도난 방지 알람이 울리면 고객의 가방을 확인하는 시간 약 3분 정도를 쓰는 게 전부였다. 문자 그대로 반나절 동안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있는 건 너무도 괴로웠지만 차라리 알람 울리는 일 없이 그렇게만 하루를 보내길 간절히 바랐다. 왜냐면 내가 배치된 출입구는 매장의 아동복 코너로 연결되는 곳이었고, 고급 유모차를 밀며 들어오는 우아한 고객님들의 부내 가득한 아우라에 잔뜩 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매장이 엄청난 고가 브랜드도 아니었고 내가 비싼 유모차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삼성동이라는 동네의 프리미엄과 평일 낮부터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는 모습으로부터 내 맘대로 ‘부잣집 사모님’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던 것 같다. 그게 편견일 수도 있고 나의 추측이 틀렸을 가능성도 높다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들은 나보다는 부자였다. 내가 12시간 동안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쥐를 참으며 돈을 버는 동안 사모님들은 같은 공간에서 돈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침드라마를 통해 학습한 바에 따르면, 그런 사모님들은 보는 직원마다 하대하고 수가 틀리면 얼굴에 물을 뿌리길 서슴지 않았다.
당연히 현실과 TV를 구분하는 지성은 갖췄지만, 알바 첫날 교육을 받을 때 “소지품을 확인하려 하면 도둑으로 몬다며 기분 나빠하는 고객들이 많으니 각오하라”는 당부와 아침 드라마에서 보던 자극적 장면들이 시공간의 방에 갇혀 제 기능을 포기한 뇌 속에서 흐릿하게 버무려지는 바람에 난 늘 쓸데없이 긴장했다. ‘그래도 부자니까 뺨 때린 다음에 합의금은 두둑하게 주겠지, 그럼 바로 알바 그만둬도 되겠지…’ 나의 영혼 없는 목례에 여유 있는 미소로 답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알람이 울리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고, 두둑한 합의금을 쥐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날 가장 놀라게 한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응대한 고객 중 그 누구도 소지품 검사를 불쾌해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어머, 미안해요! 편하게 보셔도 돼요.” 쇼핑백을 시원하게 열어젖혀준 그들 덕분에 캐셔가 깜빡한 보안택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고, 오히려 나에게 불편을 끼쳤다며 수고가 많다는 격려 앞에서 머쓱해졌다. 같은 매장 바로 옆 출입문 근처에서는 크고 작은 실랑이와 짜증이 가득 묻은 목소리가 종종 들려왔는데 나만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걸까? “딱 봐도 그 아주머니들한테서는 여유가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가 진상이 한 명도 없어.” 쉬는 시간에 마주친 선배 사원의 가설에 나도 조금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고객님들의 마음은 마치 거대하고 풍족한 숲이 그러하듯, 구석의 덤불에서 다람쥐들이 도토리 하나를 놓고 티격태격한다고 숲 전체의 평화가 깨지지 않는 것처럼, 하찮은 소란 따위로 어지럽혀질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을지도 모른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구나.’
정산을 미루던 대표와의 첫 번째 통화에서 이틀 뒤까지 돈을 기필코 보내겠다는 약속을 듣고 이틀 뒤 약속한 시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난 이 교훈을 가르쳐준 아르바이트를 한 가게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된 북페어 부스에 앉아있었다. 그날의 책 판매 수익을 기록한 엑셀 시트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며 시재를 맞추는 척을 했지만, 사실 나는 나의 곳간의 크기를 짐작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문제는 입금 여부가 아니었다. 4만 2천 원이라는 금액을 받아내겠다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온갖 독한 말을 뱉을 준비가 되었을 정도로 내가 바닥을 쳤다는 게 문제였다. 당연히 상대방의 자금 사정을 떠나서 채무는 변제하는 게 원칙이고 원인 제공은 내가 아니라 서점이 한 건 맞지만… 원리원칙과 이해타산을 떠나서 그냥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한 켠도 남아있지 않았다. 씩씩대는 콧김 뒤에는 권리를 무시당한 자의 마땅한 분노에 더해 그 돈으로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가난한 자의 아우성이 숨어있었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차라리 그 날 책이라도 많이 팔았으면 기분이라도 좋았을 텐데. 관심을 돌리기 위해 구경하던 엑셀 시트에는 나의 기대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판매 결과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럼 이제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야.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의 부스 메이트에게 잠시 전화를 하고 오겠다고 일러둔 뒤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손가락을 바들거리며 서점 대표의 전화번호를 눌러댔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놀라울 만큼 성실하고 차분하게 바로 전화를 받았고, 난 속으로 몇 번 리허설한 독기 가득한 말들을 서슴없이 뱉어댔다.
“제시간에 입금을 못 할 상황이면 먼저 연락을 주셨어야죠.”
“사무실 들어가는 대로 바로 해주시겠다고요? 이렇게 전화 끊으면 제가 또 전화할 때까지 미룰 거잖아요. 정산이 반년이 넘게 밀렸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더 이상 못 기다려요. 전화 끊지 말고 스피커폰 켜둔 상태로 입금해 주세요.”
준비 없이 불쑥 튀어나온 마지막 말이 수화기 건너편까지 깊게 찔렀다는 게 느껴졌다. 여태껏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던 상대방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로 지금… 지금 보내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날 괴롭힌 사람에게 괴롭힘을 되돌려주는 일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상대방이 먼저 싸움을 걸었더라도 말이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부터 조용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핑계를 대며 끝없이 미루는 사람도 있다는 경고를 숱하게 들었기에, 전화를 하기 전이나 후나 돈을 받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유의미한 독촉이라기보다는 그저 잃을 게 없는 사람의 마지막 발악이자 화풀이에 불과했다. 더러웠다. 타인에게 쏟아낸 오물이 나에게도 잔뜩 튄 것 같이 기분이 더러웠다. 당장이라도 목욕탕으로 달려가서 찝찝함을 벅벅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북페어 퇴근까지 두 시간이나 남아 그럴 수가 없었다. 부스 메이트에게 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면 좀 덜 찌질해보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데…
징-
핸드폰 화면이 진동하며 켜지더니 믿을 수 없는 알림창을 보여주었다.
‘XX은행 스마트뱅킹입금 OOO 42,000원 잔액 42,000원’
그렇게 이 사건은 전보다 4만 2천 원 정도 넉넉해진 통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 전의 아르바이트 경험에 대해 쓰다가 그때 번 돈을 그리워할 정도로 쪼그라든 자금 사정과, 글로 적어서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사건이 생겨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뒤틀린 창작욕을 남기고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