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정함’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그건 내가 싫어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춘 개념이다. 타고나거나 어린 시절부터 자연히 학습하지 않으면 후천적으로 갖기 어려운 태도. 갖추고 있으면 칭찬받는 덕목. 인간적이고, 따스한 여유를 닮아있는 분위기. 그래서 나 역시 내심 갈망하는, 하지만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생명체도 아닌 것을 마치 질투하듯 먼저 밀어내며 싫다고 말한다. “난 다정한 거 별로야. 오글거려.” “가식적이야.” 십몇 년째 사춘기인 사람처럼 뭐 이런 말들을 궁시렁거리며 말이다.
나의 이런 얄팍한 반응의 근원을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 보자. 난 다정함을 약점이라고 배우며 컸던 것 같다. 늘 뭐든지 잘하고 인정받지 않으면 엄마의 매가 날아오는 환경에서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내어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진짜 능력자는 본인 할 일도 잘하면서 주변에 베풀며 살겠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완벽함에 집착했고 거기에 따라오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할퀴듯 날 선 모습을 보였다.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경쟁자 내지는 장애물, 둘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참으로 속 좁은 생각이었다.
고백하기에 정말이지 부끄럽지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나의 짝꿍은 지체장애인이었다. 그는 나와 어느 정도 소통이 되긴 했지만, 둘이 팀을 이루어 같이 과제를 해야 할 때 나의 속도를 따라오기엔 역부족이었다. 초등학생이 하는 과제가 복잡하고 어려워 봤자 뭐가 얼마나 중요하겠나.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무언가를 둘이 붙잡고 씨름하는데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걸 1등 하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뭐라고 말하지.’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은 더 허둥거리는데 짝꿍은 종이 쪼가리를 잘게 찢으며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 좀 같이하자고!”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담임 선생님의 붉은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분 성함도 똑똑히 기억한다. 왜냐면 선생님은 엄마를 학교에 불러 이 일을 낱낱이 고하고 집에서 단단히 교육을 시키라고 일러두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엄마는 내게 유리병을 던져서 난 머리를 몇 바늘 꿰맸고, 거기서 내가 배운 교훈은 단 하나였다. ‘멍청이처럼 들키지 말자.’ 이후에는 평소에 내가 반의반만 닮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엄마가 언급하던 친구들을 열심히 살피며, 그들의 환한 웃음과 부드러운 말투를 따라 했다. 짝꿍에게도 그랬지만 그 안에 진심은 한 톨도 없었다. 난 그저 늘 피곤했던 나의 열두 살 인생에 또 하나의 짐이 지워진 것이 달갑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의중은 알 바 아니고 그냥 뭐든 잘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하루라도 덜 맞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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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이미 다 자란 성인을 위한 면죄부가 되기에는 너무도 오래된 역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이를 먹으면 먹으며 더욱 치열한 경쟁 속으로 걸어들어갈수록 더 이상 다정함은 중요한 덕목이 아니었다. 이미 초등학생 때 통달한 세상의 원리를 더욱 지독하게 갈고 닦으며 난 재수 없는 완벽주의자로 승승장구했다. (이 표현조차도 재수 없지 않은가?) ‘사람이 빈틈을 주지 않는다.’ ‘도통 인간적이지 않다.’ ‘…저러니까 성공하지.’ 아마도 내가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거기에서도 비슷한 평가를 받으며, 부족한 인간성을 덮을 정도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두 배로 더 열심히 일했을 거다.
실제로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상하게 직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마치 인성이 괜찮은 사람들을 걸러내는 필터가 있는 것처럼 개차반들만 남아있었다. 그런 부장에게 찍혀서 매일 폭언을 듣다가 퇴사하는 사원이 생겨도 부장이 멀쩡히 승진했던 걸 생각하면, 내가 말랑하고 어리버리한 신입사원 시절을 더 오래 견뎌서 독기 가득한 대리로 진화했다면 꽤나 성공적인 회사원이 됐을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도 한다.
뭐, 근데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난 일찌감치 회사원의 길을 그만두고 어쩌면 회사보다도 더 혹독할지도 모르는 각자도생의 정글로 걸어 나왔다. 거기서도 역시, 마치 절대 반지를 지키는 스미골 마냥 나의 밥그릇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자세가 분명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집주인과 보증금을 두고 싸울 때, 사기꾼에게 당한 친구를 위해 경찰을 불렀을 때, 생떼를 부리는 진상 고객을 응대할 때… 한 치의 부정확함도, 예외도, 빈틈도 용납하지 않은 덕분에 코를 베이지 않았다.
글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어서 자꾸만 이 글의 주제가 ‘다정함 없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처럼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건 나의 글쓰기 실력의 한계로 인한 오해다. 계속 그렇게만 살 수 있었다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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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초입, 난 능력과 잘남과 정확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독립출판의 세계로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명쾌한 정답과 평가의 척도가 존재하는 첨삭 시장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잘나거나 못났다는 평가가 환영받지 못했다. 모든 이야기는 고유한 서사로 존중받고 실패도 도전의 산물이라며 축하받았다. 분명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북페어였는데, 어느새 나는 셀러 한 명 한 명에게 귀 기울이며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써가며 책을 사 모으고 있었다. 지갑과 함께 마음도 열려버렸다. 학생 신분을 졸업한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애정한다’는 낯간지러운 표현을 서슴없이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독립출판 세상에서 만났던 동료들에게 쓸데없이 야박하게 굴다가 부끄러워진 이야기는 먼 훗날 용기를 모아 풀도록 하겠다. 일단 현재로서는 내가 벌컥 화를 냈다가 사과했던 일도, 제대로 사과하지도 못했는데 그런 모습조차도 다 이해해주어서 관계가 더 돈독해진 사이도, 아직 용기가 없어 그때 잘못했다고 인정하지도 못한 일도 있었다는 정도만 밝혀두겠다. 이전에는 똑같이 행동했어도 결과가 괜찮았다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합리화하겠지만 이젠 그럴 핑계도 없다. 왜냐면 내가 이 동료들과 함께 하는 일들은 몇 억의 예산을 굴리거나 인사 고과로 이어지는 회사원의 일도 아니고, 악덕한 건물주로부터 보증금을 지켜내기 위한 세입자의 일도 아니고, 아무튼 객관적으로 대단한 결과가 필요한 대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 행복하고 싶어서 하는 일, 그 행복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손을 맞잡는 일. 그런 일에 있어서는 경계를 풀고 과정의 즐거움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는 걸 느리게 배우고 있다. 그걸 배울 때까지 다정히 날 기다려 주는 동료들 덕분이다.
어쩌면 어린 날의 나는 용서받고 다시 시도할 기회가 절실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수하더라도 바로잡을 시간이 충분하다는 걸 배우고, 내가 경험한 너그러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서 타인에게도 마음껏 베풀며 자랐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과 같은 시행착오 없이, 가식 없는 따뜻함으로 듬뿍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겠지만 그건 평행세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대신 지금부터라도 다정한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건 나처럼 어린 시절에 너무 일찍 늙어버린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연습이다. 그때 쓸데없이 혹독하게 크느라 지쳐있을 텐데 자기 자신에 대한 다정함으로 스스로를 다독여 주자. 그리고 조금은 서툴겠지만, 그런 다정함을 베풀고 돌려받는 안전함을 경험하길 바란다.
잘은 모르지만, 왠지 그렇게 오래오래 장수하다 보면 내가 열두 살 때 어떤 아이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호호 할머니로 늙어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