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거 꼭 목에 메지 않아도 되는데...”
임시 출입증이 꼭 사원증처럼 생겼길래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이밀다가, 이 얘기를 듣고 멋쩍은 웃음과 함께 다시 벗어버렸다. 분명 이 곳은 사무실이고 나는 여기에 일을 하러 온 건 맞지만 이건 문자 그대로 임시 출입증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잠시 본사로 교육을 받으러 온 알바생이었으니까. 중간에 잠깐 화장실을 오갈 때 밖에 갇히지 않도록 사측에서 준비한 실용적인 배려일 뿐, 그건 나의 소속도, 능력도, 어떠한 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플라스틱 카드 한 장. 그걸 아주 잠깐 사원증이라고 착각해서 하마타면 목에 달랑거리며 걸어다닐 뻔했다.
근데 내가 그렇게나 사원증이 그리웠던가? 그걸 멘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생각도 못하고 왜 허겁지겁 메려고 했던 거지? 나의 행동에 아주 작은 반가움이 서려있었다는 사실이 귀갓길 내내 귀찮은 벌레처럼 머리를 맴돌았다. 뭔가 지는 기분이라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난 분명 3일 간의 회사원 체험을 끔찍하게 싫어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남이 정해준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고 하다못해 점심 메뉴도 타인과의 협의를 거쳐야 하는 자유의 박탈. 오후 3시에 산들거리는 미풍을 쐬며 고양이 뱃살을 조물락거리다가 낮잠에 빠져드는 그 기분, 3일 동안은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더욱 격렬하게 싫어했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지금 나와 같이 사는 게 백번 옳은 선택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지나친 이상에 의존해서 만족을 찾아야 할 정도로, 어쩌면 난 지금의 프리 워커 생활에 작게나마 불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과 점심 메뉴를 함께 정하고 같이 밥을 먹는게 하나도 싫지 않았다. 밥이 맛있었던 건 둘째치고 그냥 메뉴를 고르기 위해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과정에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요즘의 나는 늘 혼자서 밥을 먹는다. (그건 밥을 먹을 때의 얘기고 끼니를 거르거나 인스턴트로 대충 때울 때도 많다.) 평일 낮에 밥을 먹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본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그래, 이런 외로움은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건 굳이 밥먹을 사람을 찾기 위해 회사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뭐, 나의 작업 공간 근처에서 작업하는 동료를 구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보안 서약서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의 자세한 내용을 발설할 수는 없지만, 나를 고용한 회사가 대충 인류의 미래를 선도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말해두겠다. 난 그 과정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정도지만, 그런 일의 주축이 되어 능력 있는 동료들과 일하는 사람들은 기분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어느 정도 본인의 관심사나 비전과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참으로 보람찬 일이 아닐까? 그리고 조직의 일원이 되면 조직이 마련해준 업무 공간이나 비품부터 시작해서 인적 자원, 선구자가 갈고 닦아둔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다. 개인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런 단체가 가진 자원을 한꺼번에 누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내겐 그런 돈이 없다.)
요즘 혼자 일하면서 기획부터 홍보, 재무, HR, 유통 등등 n명의 역할을 혼자 다 하는 게 심적으로 벅찬 것도 있지만, 그러는 과정 중에 나의 성장이 자꾸만 정체된다는 느낌이 강해지는게 더 큰 문제다.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를 예로 들면, 1인 출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의 규모와 범위에는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다. 혼자서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작업하기도 어렵고, 출판과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일을 분배하는 것에 비해 각각의 분야에 대한 지식이 얕다. 유능한 외부 인력에게 외주를 맡기려면 넉넉한 예산이 필요한데 그것도 1인으로서 조달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만약 내가 비슷한 업계에서 오랜 경력을 쌓고 나와서 그 일을 독자적으로 하는 거라면 좀 더 수월했을텐데, 날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거나 시행착오 여부와 상관 없이 일정한 월급을 주는 회사가 없다보니 계속 아마추어 수준에서 맴도는 기분이다. 이대로라면 왠지 10년 뒤에도 내 수준이 똑같지 않을까? 벌써부터 괜한 걱정이다.
여기서 잠깐,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무척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분들도 계실 것 같다. 내가 퇴사 후 이런저런 일-실험을 하는 과정 중 (아마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한동안 나 자신에게도 결코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개념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동안 내게 무리한 성장보다 더 필요한 건 ‘혼자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건강하면서도 유연하게 일하는 루틴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그때그때 원하는 프로젝트를 마음껏 기획하고,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너무 옥죄지도 늘어지지도 않는 생활 패턴을 연습하며 이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자 이제는 욕심이 난다. 이런 건강한 일상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 말이다. 전에 모르던 걸 배우고, 나의 뾰족한 전문성을 갈고 닦고, 내가 무언가를 잘하고 유능하다는 감각을 갖고 싶어진다. 물론 회사를 다닌다고 이 목표가 자동적으로 달성되는 건 아니겠지만, 조직이 나아가는 방향이나 자신이 속한 업계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 있다면 단기간에 그런 감각을 쌓기에 좋은 기회가 아닐까 - 싶으면서 그런 드문 기회를 가진 이들이 부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진다. 나의 ‘뾰족한 전문성’이란 대체 뭘까. 혼자 고군분투하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수준의 능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매번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가볍게 발가락만 담갔다가 휙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대신, 프리 워커로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몸집이 큰 프로젝트를 움직일 수 있는 지점에 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녕 다시 조직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어디를 가야하며, 원한다고 갈 수는 있는 걸까? 혹은 그게 최선일까?) 그렇지 않다면 대안은 뭘까?
사원증을 닮은 임시 출입증을 보고 순간적으로 느껴졌던 끌림을 3천 자로 길게 설명하자면 이거다.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사원증을 다시 목에 멜 수 있을 것 같다는 충동. 그만큼 더 나아지고 싶다는 열망이 크다는 것이고, 그걸 꿈꿀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많이 건강해졌다는 뜻이니, 이렇게 고민을 하다보면 (꼭 다시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무언가 길이 열릴 거란 희망을 가져본다. 뭐라도 되겠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자유롭게 꿈꿀 수 있다는 게 지금 나의 생활 방식의 최고의 장점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