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23년, 그리고 <별게 다 불편해> 시즌2 연재 기간의 절반을 넘어서는 시점이다. 이쯤 됐으니 구독자를 모집했을 때부터 여러분을 살살 간지럽혔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는 게 인지상정.
‘연옥은 왜 더 이상 첨삭 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까?’
그게 뭐더라, 하시는 분들의 복습을 도와드리자면 연옥은 퇴사 후 사업자를 내고 쭉 첨삭 노동자로 살아왔다. 문자 그대로 타인의 글을 고치는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인데, 나는 주로 입시 및 취업에 요구되는 자기소개서와 면접 답변 등을 첨삭했다. 이 일은 우리나라의 공채 제도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늘 수요가 있으며, (특히 입시의 경우) 의뢰인들이 일생일대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넉넉한 금액을 지불할 의사도 있으며, 무엇보다 거래의 시작부터 종료까지 길어봤자 일주일 이내 밖에 되지 않는 단타성 프로젝트였다. 정신건강 악화로 인해 퇴사하고 언제, 어떻게 건강이 다시 나빠져 쉬어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꼭 맞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초심자의 운이 따라준 것일까? 첨삭 노동에만 매진했던 2021년 한 해에는 돈 걱정 없이 살았다. 무려 공유사무실을 임대하고 매달 적금을 붓는 걸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의뢰가 끊이지 않았다. 중간에 번아웃이 와서 한 달 정도 일을 쉬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정해진 근무일은 꼬박 채워서 사무실로 출근했다. 재밌는 아이러니다. 오락가락하는 컨디션에 맞출 수 있는 유연한 업종을 선택했는데, 막상 일이 잘 되다 보니 직장인 못지않게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만큼 나의 정신건강이 좋아졌다는 반증이었기에 여러모로 신이 났다. 돈도 벌리겠다, 건강도 좋아졌겠다,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다!
문제는 2022년 초입에 시작되었다. 전 해 겨울에 찾아온 번아웃을 잘 다독이고, 본격적인 공채가 시작되는 2월 말부터 다시 일거리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막 복귀를 하자마자 맞닥뜨린 고객들이 연달아 진상짓을 하는 바람에 작은 위기가 찾아왔다. 아직 상담 단계라 돈도 지불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만 유료로 제공되는 정보를 캐내려고 하거나, 입금 직전 단계까지 다 협의해 놓고 갑자기 잠수를 타는 사람들. 이렇게 적극적인 훼방 외에도, 모객을 진행하는 프리랜서 앱에서 자꾸만 나의 견적을 읽기만 하고 거래를 거절하는 일들이 잦아지니 다리가 달달 떨렸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합격 사례와 리뷰가 착실히 쌓인 덕분에 오히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스펙은 나아졌는데 말이다. 한 번 올린 몸값은 절대로 내리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깨고 약간의 할인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무응답과 잠수 사례가 꼬리를 무는 걸 보아 단순히 가격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고 원인을 바로잡았다면 지금도 계속 첨삭 일을 하고 있을까? 결국 원인을 찾기 못했기에 무의미한 질문이라도 던져본다. 그나마 적중 가능성이 높은 추측은, 프리랜서 앱에서 고객을 매칭해 주는 알고리즘이 변경되어서 유료 캐시를 왕창 구매하지 않은 나의 매칭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것. 덩달아 메인 페이지 상단에 노출되었던 나의 프로필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참 아래로 내려가버렸다. 이건 앱 운영자 마음이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고, 이렇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앱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고객을 찾는 게 최선이었다.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는 차선책이었다. 그럼 이제 간단한 홈페이지를 만들고 마케팅을 시작하면 된다. 자, 그럼 지금 바로 해보자!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난 엉뚱하게도 독립출판의 길에 빠져서 그 해 상반기 내내 책 제작에 매달려있었다. 일종의 도피라면 도피겠다.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하루종일 글만 쓰는 시간이 꽤나 달콤했기 때문이다. 창작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즐겁게 느낄 수 있었던 건, 그때가 사업자 등록 이후 처음으로 프리랜서 앱 알림을 꺼놓은 덕분이었다. 그 어떤 고객도 연락을 주지 않는다는 걸 매 순간 굴욕적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나 혼자 짝사랑하던 사람을 먼저 차버리는 심정으로 내린 특단의 조치가 의외로 큰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잠들기 전까지 잠재적 고객의 견적 문의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압박이 어마어마했다. 거래에 합의하고 선입금을 받는 순간 그 고객과의 연락 시간은 오후 1시부터 7시 사이로 엄격하게 제한했지만, 아직 나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은 ‘잠재적’ 고객에게는 그럴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한시라도 메시지 확인이 늦으면 다른 경쟁자에게 고객을 뺏길지도 모르는 일. 회사를 다닐 때, 잠드는 순간에도 베개 밑에 핸드폰을 넣어 진동을 느끼면 깰 수 있도록 했던 습관이 도움이 되었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한두 건의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앱을 꺼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단타 작업 특성상 작업 각각의 견적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매달 최소 30명 이상의 새로운 고객을 모객 해야만 목표한 월 매출을 달성할 수 있었다. 드물게 수십 만 원 단위의 작업을 연달아 받아서 목표를 조기 달성하더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개편된 알고리즘 때문에 앱에서의 활동이 저조할수록 신규 고객과의 매칭 가능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고객이 나에게 문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채팅방에 접속하면 답변까지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부터 보이는 것도 문제였다. 당시에 나는 ‘평균 5분 이내’라는, 거의 챗봇 수준의 답장 속도를 자랑했는데 그걸 ‘1시간 이내’ ‘24시간 이내’로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많은 회사들이 채용 공고일로부터 서류 제출 마감일까지 시한을 넉넉하게 주지 않고, 면접 역시 면접 대상자 발표일로부터 며칠 이내에 속성으로 진행하는 만큼 고객들은 날 24시간이나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원인 분석은 끝났고 거기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지는 나의 선택이었다. ‘아! 이런 특성을 고려해서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 만약 이런 생각이었다면 난 책 작업을 마무리하자마자 다시 첨삭 시장으로 뛰어들었어야 한다. 하지만 7월에 책을 출간하고 내가 선택한 다음 목적지는 뜬금없게도 고등학교 급식실이었다. 거기서 난 위생모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매일 3시간씩 걸레질을 하면서 퇴사 후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걸 벌었다. ‘새로운 고객 찾아다니는 게 너무 지긋지긋하다. 돈도 못 받은 상황에서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희망고문 당하니까 지친다. 그런 불확실성 없이 매월 일정한 금액이 통장에 꽂혔으면 좋겠다.’ 이게 나의 결론이었다.
급식실 청소 알바는 겨울방학과 함께 종료되었고, 개학하면 다시 일하고 싶을 정도로 일을 좋아했던 나의 마음과 달리 왼쪽 팔꿈치와 손목의 통증은 가라앉을 낌새가 없었다. 반면 신체 노동을 수반하지 않는 사무직 알바는 말이 알바지 사실상 최저시급을 주는 풀타임 노동이 대부분이었다. 제한된 체력과 정신력으로 인해 퇴근 후 밤을 새 가며 글을 쓸 여유가 없었던 나에게는 적절하지 못한 선택지였고, 그렇게 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쩔 수 없다. 도저히 돈을 못 벌겠다!’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들이 슬슬 회사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시점이 퇴사 후 3년 차라고 했던가. 그들에겐 재취업이 현실성 있고 또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정신 건강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건 조직에서 뛰쳐나온 덕분이고, 거기로 돌아가면 언제든 다시 바닥을 찍을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내겐 조직 밖에서 해보고 싶은 일들이 아직 너무도 많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통장 잔고가 날 지탱할 수 있는 날짜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먼 미래를 기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그래서 솔직히 앞날이 그저 시꺼매 보일 때도 많지만.
아직은, 아직까지는,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발악하며 지켜보고 싶다.